국민은 아직도 바보다. 실컷 놀아나 보자?
정치 지상주의에 빠진 이명박과 그 일행들에게 우리는 어디까지 끌려 갈 것인가?
예술을 위한 예술, 예술 지상주의, 탐미주의 혹은 유미주의라고도 불리는 이 장르의 특징은 허무에서 나와 허무로 돌아 간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이 장르에 짐짓 열광을 보태기도 하지만 돌아 서서 살펴 보면 아무 얻은 게 없다. 산다는 게 참 부질없구나 하는 허무의 발 자국이 몇 개 남아 있을 뿐이다.
그래서 러시아의 휴머니스트 소설가 톨스토이는 일찍이 이런 말을 했었다. "도덕이 결여된 예술에서 우리는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 탐미주의가 정점에 이르던 시기에 나온 발언이었다. 탐미주의와 허무주의가 일란성 쌍둥이라는 의심할 바 없는 사실에 기초한 발언이었다.
이명박 대통령과 그 일행들의 발 자국을 따라 가다 보면 곧 잘 만나는 구멍이 하나 있다. 화려한 커튼 뒤에 감추어진 피 비린 내가 진동하는 시커먼 이 구멍은 파스트르 쥐스킨트의 소설 <향수>를 떠 올리게 한다. 독특한 체취를 가진 여성들만을 골라서 연쇄적으로 살해하고 그 향기를 채취한다는 내용의 이 탐미주의 소설은 영화로도 만들어져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킨 바 있다.
한 나라 국정을 책임지는 대통령과 대중 소설 <향수>에 무슨 연결 고리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이런 질문으로 답할 수 있다. "대통령이 개인 취향에 따라 설정한 목적이 스스로 아름답다고 여긴다면 그 어떤 수단이라도 묻지도, 따질 필요도 없이 공리적으로 아름다운가?" 하고 말이다.
지난 해 세 밑 23일에 우리는 아주 수상한 위원회가 탄생하는 것을 지켜 본 바 있다. 이름하여 사회 통합 위위회. 소모적인 갈등으로 다 함께 망하기 전에 갈등의 뿌리를 찾아서 잘라 내고 화해, 상생을 하자는 대통령의 강한 의지가 투영된 기구라는 일부 언론의 친절한 해설과 함께 출범한 이 위원회는 그 성격이 갈수록 오리무중이다.
대체 무엇을 하자는 기구일까? 아마도 위원회에 참여하는 인사들조차도 자기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인지 모르고 있음에 분명한 대통령 혼자서만 알고 있을 것으로 믿어지는 사회 통합 위원회가 대통령 직속으로 간판을 단 지 채 보름도 지나지 않은 금년 1월 9일. 그 날은 저 끔찍한 용산 참사의 악몽을 현재 진행 형에서 과거 형으로 일단 봉합을 하기로 약속한 날이었다.
세계사적으로도 유례가 그리 많지 않은 350여 일만의 장례 식이 예정된 그 날 아침 우리의 이명박 대통령께서는 매우 독창적인 정치적 결단을 내리고 있었다. 세종시 문제와 관련해서 의연하고 당당하게 대처할 것을 당부하는 형식의 지시를 내렸다는 보도가 나온 것이다. 여기서 당당하게 나아가라는 주문은 타협이나 양보 따위는 프로그램 어디에도 없으니까 흔들리지 말고 죽을 힘을 다해 밀어 붙이라는 명령에 다름 아니다.
화해를 말하고, 상생을 말하며, 심지어는 사회 통합까지 소망하며 대통령 직속으로 담당 기구까지 설치한 대통령의 입에서 차마 어찌 저런 말이 나올 수도 있느냐고 묻는다면 아마 "그대는 아직도 그렇게 순진한가?" 하는 답이 돌아 올 것이다. 사람이 연애 같은 서정적인 것을 할 때는 순진하다는 말이 매우 고무적으로 아름답지만 정치 같은 서사로 들어 가면 순진은 곧 바보가 되어 버린다.
어쨌든 이명박 대통령은 당당함과 의연함을 주문했다. 의연함은 그렇다 치고, 인간의 당당함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돈인가? 권력인가? 아니면 도덕? 이명박 대통령의 도덕은 이미 검증된 바 있다. 그에게 표를 던진 유권자들은 그의 형편없는 도덕을 사면하고 복권까지 해 주었다. 도덕이 밥 먹여 주지 않는다는 아주 참신한 새로운 격언을 만들어 가면서.
도덕이 결여된 정치에서 인간은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
오늘 우리는 이명박 대통령과 그 일행들에게 톨스토이 식 문법으로 이렇게 물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도덕이 결여된 정치에서 인간은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 하지만 이런 고급 질문은 지금 우리 사회에서 통하지 않는다. 그러니 아껴 두는 것이 좋다. 일에는 모름지기 순서가 있는 법이다. 아무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고급 질문을 던져 봤자 돌아 오는 답은 앵무새의 그것 "그대는 아직도 그렇게 순진한가?"일 뿐이다.
도덕이 밥을 먹여 주는 것은 아니라 해도 내가 아픈 일이라면 다른 사람도 아프게 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주며, 그런 이신전심에서 나오는 바람이야말로 참된 희망이라는 것쯤 모르는 사람 거의 없다. 불행하게도 극소수 인간 삶의 그러한 원리를 모르거나 알아도 애써 외면하는 사람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도덕을 외면하는 사람이 공통적으로 빠지는 세계가 있는데 그것이 저 유명한 허무주의다.
허무주의의 특징은 지나치게 우울하거나 지나치게 쾌활하거나 혹은 자신만만해서 과대망상에 빠진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먼지로 집을 짓고, 거미 줄로 옷을 해 입으며, 이슬만 받아 먹어도 배가 터질 지경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자기가 보고자 하는 것만을 보고, 듣고자 하는 것만을 들으며, 가고자 하는 곳만을 간다. 더욱이나 그들은 현실을 살면서도 현실이 아닌 미래만을 생각한다. 그것도 자기 머리 속만의 미래를.
예술가들이 이러한 허무주의에 빠지면 그나마 독창적인 발견이라도 가능하지만 정치가들이 이런 허무주의에 빠지면 대략 난감 그 이상의 어느 지점에서 발이 묶인 채 아우성이나 질러 대야 한다. 이명박 대통령과 그 일행들이 대략 난감 이상의 허무주의에 빠져 허덕이고 있다는 증거는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대통령이 당당하고 의연하게 밀어 붙이기를 하겠다는 자신의 오랜 생각을 만천하에 공표하기 하루 전날 집권당의 정몽준 대표는 신년 기자 회견을 통해 아주 의미심장한 발언을 하고 있었다. "여야 대표가 한 달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만나서 악수를 하는 것만으로도 상처 받은 국민에게 위로가 될 것"이라고 그러니 자주 만나서 국정을 심각하게 걱정하는 척이라도 하자는 제안이었다.
그런가? 여야 대표가 만나서 악수를 나누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상처 받은 마음은 위로를 받고 씩씩할 수 있게 되어 있는가? 이 얼마나 대담한 착각인가. 하지만 아직 감탄은 이르다. 정 대표에게 그것은 착각이 아니라 사실이고 현실이며 당면 과제일 테니까.
사람이 사람과 우연히 마주치는 것도 아니고 사전에 시간과 장소를 약속하고 만날 때는 전제되는 조건이 있는 법이다. 이 때의 조건이란 명시적일 수도 있지만 묵시적일 수도 있다. 명시적이거나 묵시적이거나 서로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것은 어떤 경우라도 포기할 수 없는 절대적 가치이다.
타협이나 협상 따위에는 관심도 갖지 말고 의연하고 당당하게 밀어 붙이라는 대통령과 자주 만나서 사진을 찍자는 당 대표. 이것은 전형적인 성동격서 전략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글쎄, 영리한 정 대표가 그것만을 계산하고 있었을 것 같지는 않다.
정몽준 대표의 눈에 비치는 국민은 아주 순수하고, 순진하다. 그래서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악수를 하는 것만으로도 기쁘고, 기뻐서 절로 미소가 지어지고, 그래서 금방 금방 희망도 갖고 하는 그런 존재들이다. 정몽준 대표의 눈에 비치는 국민들은 그래서 바보다.
정몽준 대표의 이러한 상황 인식은 자신의 공부에서 온 것일 수도 있겠지만 역시 그 분 이명박 대통령의 어록을 배제하고는 이해하기 어렵다. 정운찬 총리가 수렁에서 열심히 거품을 흘려 가며 대통령의 어록을 하나 하나 꿰미에 꿰는 배역을 맡고 있다면 정몽준 대표는 날개 없는 새를 타고 다니며 국민들의 관심이 하나로 집중되는 것을 저지하는 배역을 맡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명박 대통령과 그 일행의 눈에 국민은 이미 주권을 가진 실체적 존재가 아니라고, 선거가 있을 때만 잠시 적당히 풍선 같은 꿈이나 안겨 주며 가지고 놀다가 버리면 되는, 버려도 아무렇지 않은 바보들일 뿐이라고.
이제 우리는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한다. 우리는 아직도 바보인가? 우리에게 주어진 배역은 아직도 바보 역할인가?
예술 지상주의는 적절한 선에서 토막을 내 줘야 한다. 안 그러면 사회 전체가 말초적 쾌감에 빠져 허덕이다가 종당에는 제 손으로 제 손발을 잘라 내게 된다. 정치 지상주의는 보다 현실적이고, 보다 시급하다.
오마이뉴스 김수복 기자
대통령이 아닌 인간적인 바보 노무현이 생각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