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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저널/단종과 성삼문

단종과 성상문-수양대군과 신숙주

by jaky7080 2013. 12. 1.

단종과 성상문-수양대군과 신숙주

단종(비운의 왕)

건강이 좋지 않아 숨진 문종의 뒤를 이은 하나뿐인 문종의 아들로 단종대왕이다. 왕이 어린 나이에 직위하면 어머니나 할머니가 수렴청정을 하거나 그의 측근이 대리 청정을 하는데 단종의 경우에는 삼촌인 수양대군에게 대리청정을 받다가  반강제적으로 상왕자리로 밀려나게 되고 훗날 세조(숙부인 수양대군)에 의해 상왕에서 노산군으로 강봉(降封)당한 뒤 청령포에 유배되었다가 관풍헌에서 사약을 받고 죽임을 당한후 장릉에 묻히기까지, 강원도 영월 곳곳에는 단종의 슬픈 흔적이 남아 있다.

 

관풍헌에서 사약을 받고 죽은 단종의 시신은 수습되지 않고 동강에 버려졌다. 아무도 시신을 거두는 이가 없었다. 세조가 “시신을 거두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엄명을 내렸기 때문이다. 단종은 죽은 후에도 편안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영월 지방의 호장이었던 엄흥도가 목숨을 걸고 동강에 나가 버려진 단종의 시신을 거두었다.

 

엄흥도는 지게에 단종의 시신을 싣고 동을지산 능선을 오르다 노루가 잠자던 자리에 눈이 쌓여 있지 않은 것을 보고 그곳에 시신을 암매장했다. 세월이 흐른 뒤 영월에 부임하는 군수들이 줄줄이 죽는 괴이한 일이 발생했다. 누구도 영월군수로 오려고 하지 않았는데, 박충원이라는 사람이 용기를 내 부임했다. 어느 날 박충원의 꿈에 단종의 혼령이 나타나 산 속에 묻힌 사실을 알려주었고, 그곳을 수색한 결과 단종의 시신이 발견되어 봉분을 정성스레 조성했다. 그 후로 영월군수가 변을 당하는 일이 없어졌고 영월 땅도 평안했다고 한다.

 

 

 

서강으로 둘러싸인 청령포 전경

 

 

단종이 죽고 200여년이 지난 숙종때가 되어서야 왕으로 복위가 된다.

단종은 슬프고 외로운 왕이네요. 부디 저세상에서 세종대왕과 어머니 현덕왕후를 만나

행복하시길 빕니다.

 

 

   

      강원도 영월의 장릉(여기는 무신이 없다)                         관풍헌 누각 자규루

 

 

단종이 관풍헌 누각에 올라 자신의 한을 그리며 쓴 詩

달 밝은 밤 두견새 울 제
시름 못 잊어 누각 머리에 기대었노라
네 울음 슬프니 내 듣기 괴롭도다
네 소리 없었던들 내 시름없었을 것을
세상에 근심 많은 분들에게 이르나니
부디 춘삼월 자규루에는 오르지 마오

 

 

"두견새 우는 청령포 - 심수경"(듣기를 원하시면 플레이 버튼을 클릭하세요)

 

 

 


 

세조(수양대군: 나쁜?)

세종의 둘째아들로 훗날 단종을 보위하는 김종서와 맞서고(계유정난) 끝내는 단종을 페위시키고

조선 제7대 왕 세조로  등극하는 인물이다. 그리고 자신의 권력을 위해 너무나 많은 사람을 죽였다

그로 인해 나중에 몹쓸 피부병과 죄책감으로 고통 받다 재위 14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맨 아래에서 세조에 관해 다시 디테일하게 설명함.


 

신숙주(申叔舟·1417~75)와 성삼문(成三問·1418~56)은 세종의 전폭적 지원 아래 집현전에서 신흥강국 조선의 꿈을 현실로 옮긴 당대 최고의 엘리트 학자였다.

두 사람에게 세종은 현실 세계를 초월한 영원한 주군이었다. 그러나 세조의 집권으로 가족보다 더 가깝던 두 사람의 우정은 깨지고 신숙주는 부귀영화의 길로, 성삼문은 사육신의 길로 갈라선다.

신숙주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옛 동무 성삼문을 바라보며 회상에 젖는다.

 

 

신숙주(변절자로 녹두나물 불리운다)

단종을 복귀시키려는 성상문에 맞서 신숙주는 단종을 폐위시키는데 일조한다.

신숙주는 김종서의 천거로 밑에서 일을 하면서 황보인과 함께 어린 단종을 잘 보살피라는 문종의 고명을 받았다. 하지만 신숙주는 야심만만한 수양대군 편에 섰고, 자신을 천거한 김종서를 죽이고 단종을 폐위시키는 계유정란에 참여한 이후 승승장구해 영의정까지 올랐다. 이후에도 4차례나 공신에 책정됐다.

반면에 신숙주와 절친이자 집현전 동료였던 성상문은 단종의 복귀를 시도하다가 발각되어 거열형(마차로 사지를 찢어죽이는 형)을 당했고, 자식들은 교수되고 부인과 딸들은 노비로 팔려가는 치욕을 당했다.

신숙주는 이때 성상문 뿐만 아니라 단종까지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에 선현들은 권력에 빌 붙어서 동료와 모시던 왕까지 팔아 먹는 변절자를 비웃으며 쉽게 변하는 녹두나물을 신숙주로 부르는 계기가 되었다.

 


 

 성상문(사육신 중의 한분)

* 조선시대 의 대학자인 성삼문은 단종왕의 충신으로 세조가 단종을 폐위하고 왕으로 등극하자 신하가 두임금을 섬길 수 없다 하여 조당에 출석치 않으매, 결국 세조는 반대파를 반역으로 몰아 처형 시켰는데 당시 사형당한 충신들을 역사는 사육신이라 부르고 있다.

 

성삼문이 체포되어 죽음 직전에 지은 시 중 

 

 

이 몸이 죽어가셔      -성삼문(成三問)

이 몸이 죽어가셔 무어시 될고하

蓬萊山(봉래산) 第一峰(제일봉) 落落長松(낙락장송) 되야이셔

白雪(백설) 滿乾坤(만건곤)할 獨也靑靑(독야청청)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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蓬萊山 : 중국의 삼신산 중 하나이나 조선의 금강산으로 보기도 합니다

落落長松:  키가 크고 가지가 축축 늘어진 큰 소나무를 말합니다

滿乾坤 : 하늘과 땅에 가득참을 의미 합니다

獨也靑靑 : 홀로 푸르고 푸름을 의미합니다

해석하면

가장 높은 곳에 있는 푸른 소나무가 되어 흰 눈이 온 세상을 덮을 때에도 홀로 푸른빛을 발하리라 이런 의미를 나타낸 시조입니다. 즉 내가 죽은 후에도 지조를 지키겠다는 선비중의 선비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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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삼문이 처형당시 지은 절명시(絶命詩)- 

격고최인명(擊鼓催人命)

처형장의 북소리는 죄인의 생명을 재촉하고,- 

0.서풍일욕사(西風日欲斜)

-서풍이 부니 해는 서산으로 넘어 가려고 하는구나,- 

0.황천무객점(黃泉無客店)

-황천으로 가는 길에는 주막조차 없다는데,- 

0.금야숙수가(今夜宿誰家)

-오늘밤은 뉘 집에서 잠을 자고 갈거나 !!-

 


 

 

 

 

 '공주의 남자' 속 사육신은 이렇다.

단종의 복위를 위해 거사를 준비했지만 이를 눈치챈 한명회와 수양대군에 의해 결국 죽임을 당하고 만다. 한국 역사에 두고두고 회자될 명언인 "나리"가 드라마 속에서 다시 한번 펼쳐지기도 했다. 이 가운데 계유정난에서 죽은 김종서의 살아남은 아들 김승유가 이들을 도왔다는 픽션도 가미됐다. 사육신을 구하러 간 김승유에게 사육신은 "죽어서 김종서 대감을 당당히 만날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마치 죽은 김종서의 유지를 받든 비장함마저 느껴진다

 

 과연 그럴까? 역사를 뒤적이다보면 재미난 상황이 연출된다.

사육신의 대표적인 인물 성삼문이 바로 김종서를 몰아낸 계유정난의 공신으로 이름을 올렸기 때문이다. 성삼문은 당시 정난공신 3등에 책봉됐다. 결과론 쪽으로 성삼문은 김종서를 몰아내는데 동조한 혹은 지지한 세력 인물인 셈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당시 조선의 상황을 현실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조선 초기 왕과 왕족을 중심으로 한 친족 운영체제에서 국가가 자리를 잡으며 신권이 강력하게 대두되기 시작하는 시점이 다가온다. 바로 세종 이후 문종 단종으로 이어지던 시기를 말한다. 조선 4대왕 세종은 강력한 왕권을 만들기도 했지만 유교론의 정치철학 또한 확고히 받아들였다.

유교적 정치는 강력한 왕권 중심의 정치체제가 아니다. 왕권과 신권이 조화를 이루며 상호 견제와 보완을 최우선으로 바라본다. 유교 국가에서 신권이 강력해질 수 밖에 없는 이유다.

세종 말기가 되면서 이 성립할 수 없는 두 이념이 부딪히기 시작한다.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으로 대표되는 왕족 세력과 김종서와 황보인의 신권이 대립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가운데 소장파 유학자들은 김종서와 황보인보단 왕족 세력에 힘을 실어준 것으로 보인다. 이유는 간단하다. 김종서와 황보인 등으로 대표되는 소수 재상들의 권력이 너무 강력해진 나머지 왕권이 무너지고 있다는 판단이 서려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세종 이후 문종과 단종 시대 왕권이 추락하고 신권이 강력해지면서 유교적 정치철학과는 거리가 멀어졌다. 혈기 왕성한 젊은 소장파 유학자들은 이를 옳지 못하다 판단했을 법하다.

명망이 높던 소장파 학자였던 신숙주가 수양대군 편으로 돌아선 것도 사실 이런 이유를 조심스레 바라볼 필요가 있다.

성삼문 역시 이런 이유로 계유정난을 지지했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 물론 일각에선 한명회를 비롯한 수양대군 파들이 자신들의 '쿠데타'를 정당화하기 위해 이름 높은 유학자들을 공신으로 높였다는 풀이를 하기도 한다. 이 역시 중요한 이유가 될 수 있으나 당시 소장파 유학자들의 움직임도 중요하게 바라봐야 할 대목이다.

결국 당시 성상문 등 소장파 유학자들은 김종서와 한 궤를 이뤘다고 보기 힘들다.

계유정난 후 신권과 왕권의 조화를 이루길 바랬던 그들의 의지와 달리 수양대군은 결국 단종의 왕위 자리를 빼앗다시피 했으며 이후 왕권 강화에 몰두하며 이를 표출하기 시작했다.

 

단종 복위 운동이 일어난 이유는 집현전 중심의 유학자들이 이런 세조독주체제에 대해 치켜세운 반기로도 풀이할 만하다.

'공주의 남자'가 뛰어난 재미에도 불구, 역사론적으로 다소 비판을 받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너무 극명한 흑백논리가 깔려져 있다 보니 역사를 팩트가 아닌 감정으로만 대입시키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러다보니 이야기 구도 역시 '모 아니면 도', '착한 님 아님 나쁜 놈' 식으로 일부 허구화되는 아쉬움도 남고 있다.

물론 드라마에 역사교과서를 담을 순 없다. 이를 강요해서도 안된다. 하지만 재미를 위해 역사적 사실을 비꼬기 시작하면 그 여파는 상상을 초월할 수도 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또한 역사를 바로 알아야 하고 예나 지금이나

권력의 불의를 보고 눈감거나 외면하려 한다면 조국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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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육신 묘비 

 

 


 

 

 

조선 최고의 묘호를 쓴 왕

세조

 

나는 너희들을 강요하지 않겠다. 따르지 않을 자들은 가라. 대장부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한 번 죽는다면 사직(社稷)에서 죽는 것이다. 나는 혼자서라도 가겠다. 계속 만류하는 자가 있다면 먼저 그부터 목을 베겠다. ([연려실기술] 세조, 정난조)

 

 

피의 군주와 치적군주라는 양면성을 가진 수양대군

 

수양대군(首陽大君)으로 더 많이 알려진 조선왕조 7대왕 세조(世祖, 1417~1468, 재위 1455~1468).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단편적으로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엇갈린다. 어린 조카인 단종(端宗)의 왕위를 찬탈하고 수많은 신하들을 죽인 피의 군주이면서, 부친인 세종의 위업을 계승한 치적군주의 이미지도 아울러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수양대군은 1417(태종 17) 929일 세종과 세종 비 심씨와의 사이에서 문종에 이어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차남이 아닌 장남으로 태어났다면 조선왕조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을 일으킨 주인공이 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에 몰두한 장남 문종, 문장과 서예에 뛰어났던 안평대군과 달리 거침없고 욕망이 강한 인물이었다. 세종은 일찍이 병약한 문종과 어린 단종을 보면서 수양대군의 존재를 걱정했다. 원래 수양대군은 진양대군이었다. 수양대군으로 이름을 고친 사람은 부친인 세종이다. 세종이 수양대군으로 이름을 바꾼 것은 아마도 수양산에서 절개를 지키다 굶어 죽은 백이숙제처럼 절개를 지키라는 의미였을지 모른다. 세종은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인 성왕을 성군으로 만든 주나라의 주공(周公)처럼 되기 바랐지만, 수양대군의 속마음은 달랐다.

 

계유정난을 일으키고,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다

 

쿠데타의 최대 희생자인 단종은 1452518일 경복궁 근정전에서 12살이라는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39세라는 한창 나이에 세상을 떠난 문종은 어린 아들을 김종서(金宗瑞황보인(皇甫仁) 등 원로대신에게 부탁했고, 이러한 구도는 당장 수양대군안평대군 등 종친세력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단종 즉위 이후 정국은 수양대군파와 문종의 고명을 받든 황보인·김종서파로 나뉘게 되었다.

 

 

이러한 대결구도는 1453(단종 1) 1010일 계유정난(癸酉靖難)이라 불리는 기습 공격을 앞세운 수양대군의 승리로 돌아갔다. 수양대군은 무방비 상태의 김종서와 황보인을 철퇴로 격살하였고 문인들의 신망을 받았던 라이벌 안평대군을 강화로 귀양 보내 버렸다. 당시 수양대군의 핵심참모였던 한명회(韓明澮)는 쿠데타에 대비하여 살생부를 작성했는데, 입궐하는 대신들을 향해 죽이라는 신호를 보내면 모조리 죽이는 식이었다

 

쿠데타의 명분은 약했고, 어린 단종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이었다. 영의정 자리에 오른 수양대군은

정인지(鄭麟趾)를 좌의정에, 한확(韓確)을 우의정으로 삼고 군권을 장악하였다. 수양대군은 자신이 세운 공을 주공(周公)에 비유하기 위해 집현전 학사들에게 교서를 작성하게 했다. 집현전 학사들은 모두 도망가고, 유성원(柳誠源)만이 남아 있다가 협박 속에 초안을 작성했다.

 

태어나면서 어머니를 잃고 다시 아버지마저 잃은 어린 단종은 왕위에 오른 지 3년 만인 1455년 윤 611일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형식적으로는 양위였지만, 숙부의 위세에 눌려 왕위를 빼앗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때 왕의 옥새를 전달하는 임무를 맡은 이가 성상문(成三問)이었다. 양위식을 담당한 성삼문이 옥새를 부여안고 대성통곡을 하자 세조가 성삼문을 한참 동안이나 노려보았다고 전한다. 세조는 왕위에 오른 후 단종을 상왕으로 추대하고 금성대군집에 살게 했다. 말이 좋아 상왕이지 가택연금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단종의 거처에는 군사 10명을 거느린 삼군진무 2명을 배치하여 주야로 경계와 감시를 하도록 했다.

 

 

불발로 끝난 단종 복위 운동, 그리고 사육신과 생육신

 

 

왕위에 오른 세조는 재위기간 중에도 수많은 난관에 봉착했다. 이른바 사육신(死六臣) 사건을 비롯하여

금성대군이 주동한 단종 복위운동이시애(李施愛)의 난 등 즉위 초반에는 불안의 연속이었다. 이러한 난관들은 대체로 그의 정통성을 문제 삼아 일어난 것들이었다. 왕위찬탈자라는 명분상의 약점은 언제든지 단종의 복위운동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특히 집현전 출신의 젊은 학자들이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판적인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이들은 혈기왕성한 유학자들답게 명분을 중히 여겼다. 게다가 세조가 왕위에 오른 후 정국주도권이 세조의 측근공신들에게 넘어가면서 소외되었다이런 상황에서 집현전 출신의 젊은 관료들과 단종 및 문종 처가 식구들을 중심으로 단종 복위 움직임이 조심스럽게 이뤄지고 있었다. 중심인물은 성삼문과 박팽년이었다. 승정원에 근무했던 성삼문은 나름대로 세조의 동태를 파악하고 있었고 명나라 사신이 한양에 도착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145661일에 거사를 이루기로 했다.

 

성삼문과 박팽년이 말하기를 61일 연회장의 운검(雲劒)으로 성승과 유응부가 임명되었다. 이날 연회가 시작되면 바로 거사하자. 우선 성문을 닫고 세조와 그 우익들을 죽이면, 상왕을 복위하기는 손바닥 뒤집는 것과 같을 것이다.”([연려실기술] 단종조 고사본말)

 

그러나 이들의 거사는 채 이루기도 전에 발각되고 말았다. 성삼문과 함께 단종복위를 도모하던 김질이 단종 복위음모 사실을 누설해 버린 것이다. 세조는 김질과 성삼문을 불러 들였다.

 

 

너희들이 어찌하여 나를 배반하는가.”

 

 

 옛 임금을 복위하려 함이라, 천하에 누가 자기 임금을 사랑하지 않는 자가 있는가. 어찌 이를 모반이라 말하는가. 나 성삼문이 이 일을 하는 것은 하늘에 두 해가 없고, 백성은 두 임금이 없기 때문이라.”

 

인두질에 성삼문은 도모하던 동지들의 이름을 대었다. 이에 따라 성삼문을 비롯한 박팽년·하위지·이개·유응부·유성원·김문기 등 이른바 사육신들이 체포되어 죽음을 당하거나 자결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당시 성삼문은 시뻘겋게 달군 쇠로 다리를 지지고 팔을 잘라내는 잔학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세조를 나으리라 부르며 왕으로 대하지 않았으며, 나머지 사람들도 진상을 자백하면 용서한다는 말을 거부하고 형벌을 당했다. 박팽년·유응부·이개는 작형(灼刑:단근질)을 당하였고, 후에 거열형을 당하였다. 하위지는 참살 당하였으며, 유성원은 잡히기 전에 자기 집에서 아내와 함께 자살하였다.

 

이에 앞서 세조는 성삼문과 거사를 도모한 박팽년을 평소 총애하고 있었다. 조용히 사람을 보내 네가 내게 항복하고 같이 역모를 안 했다고 하면 살 수 있을 것이다.”고 하였다. 박팽년이 웃고 대답하지 않으며, 세조를 부를 때는 반드시 나으리라고 하였다. 세조가 화를 내며 그 입을 마구 때리게 하고 말하기를, “네가 이미 신이라 일컬었고 내게서 녹을 먹었으니, 지금 비록 신이라 일컫지 않더라도 소용이 없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박팽년은 내가 상왕의 신하로 충청 감사가 되었고, 장계에도 나으리에게 한 번도 신이라 일컫지 않았으며, 녹도 먹지 않았다.”고 하였다. 실제로 그 장계를 대조하여 보니, 과연 신()자는 하나도 없었고 신자 대신에 거()자로 썼으며 녹은 받아서 먹지 않고 창고에 쌓아 두었다고 한다.

 

불발로 끝난 단종 복위사건은 단종에게는 오히려 악재로 작용했다. 이 사건으로 단종은 상왕에서 쫒겨나 노산군으로 강등되었다. 또한 문종의 비였던 현덕왕후 권씨는 사후에 폐비되고 무덤이 파헤쳐지는 수난을 겪었다. 사육신 가문의 남자들은 모두 죽었고 처나 딸들은 공신들의 여종으로 주어졌다. 성삼문의 아내 차산은 박종우에게 주어졌고, 박팽년의 아내 옥금은 정인지에게 주어졌다.

 

사육신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생육신(生六臣)이 있기 때문이었다. 사육신은 이미 죽었지만 살아남은 생육신 중의 한 사람인 남효온(南孝溫)[사육신전]을 지어 세상에 유포시킴으로써 이들의 이름이 후세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계유정난 이후 세조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고 은둔으로써 항거했던 여섯 명의 선비가 있었는데 이들은 목숨을 내놓고 저항했던 사육신과 대비된다는 의미에서 생육신이라 하였다. 김시습·원호·이맹전·조려·성담수·남효온이 그들인데 이들은 한평생 벼슬하지 않고 단종을 위해 절의를 지키다 세상을 떠났다.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 운동은 자신과 단종을 죽음으로 몰아가

 

 

세종의 여섯 번째 아들인 금성대군은 형인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키자 공공연하게 반대하고 나선 인물이다. 불온분자로 낙인 찍힌 이후 경상북도 순흥으로 유배되었다. 유배지인 순흥에는 부사로 있는 이보흠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금성대군은 이보흠을 포섭하여 단종을 복위시키려 했다. 그러나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 기도는 허무하게 좌절되었다. 금성대군에게는 금연이라는 여종이 있었는데 이 여종이 이보흠의 종인 이동과 눈이 맞았다. 이동은 상전인 이보흠과 금성대군이 심상치 않은 일을 꾸민다는 것을 알아차렸고 이 기회로 출세해 보고자 하는 야망이 있었다. 이에 금성대군이 작성해 놓은 격문을 훔쳐 달아나 안동부사에게 이 일을 고해바쳤고, 뒤에 이를 안 이보흠도 후환이 두려워 금성대군의 역모 사실을 알렸다.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운동은 금성대군뿐만 아니라 단종에게도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세조는 금성대군에게 사약을 내렸고 노산군에게도 사약을 내렸다. 순흥부는 이후로 반역의 고을이 되었다. 순흥부의 토박이 향리들은 거의가 죽임을 면치 못했다. 순흥부는 단종의 신원이 복위되는 숙종 때까지 쑥밭으로 남아 있었다

 

 

세조는 반대파를 공개 처형하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정적들을 제거하면서 정치를 안정시켰다. 그 과정에서 신권을 축소시키고 왕권을 강화시키다 보니 문치(文治)보다는 패도(覇道) 정치로 변모해 갔다.

그 결과 유교 대신 불교를 숭상하는 정책을 펴서 불경 간행 등 공적도 남겼으나, 독단적인 정치에 따른 폐해도 적지 않았다. 더욱이 세조는 자신의 골육인 단종과 금성대군 등을 죽이면서 자신을 왕으로 옹립한 한명회· 신숙주 등을 효과적으로 견제하지 못하고 오히려 혼인을 통해 연결되어 이들의 권세를 더욱 심화시켰다. 게다가 강력한 중앙집권화를 추진하던 도중 이시애의 난을 만나자 오히려 주춤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파란만장한 생을 살았던 세조도 죽음을 예감하고 계유정난에 관계되어 귀양가거나 종이된 사람 수백명을 풀어주고 1468(세조 재위 14) 음력 97일 아들인 예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세상을 하직했다.

 

또한 한명회는 수양이 죽은지 17년후 연산군의 생모 윤비 폐사에 관련되었다 하여 무덤에서 꺼내져 결국 시체의 몸으로 목이 잘리는 부관참시에 처해졌다.

 

 

최고의 묘호를 받은 세조, 그 묘호에 담긴 뜻은

 

 

왕이 죽으면 왕가의 사당인 종묘(宗廟)에 신주(神主)를 모시게 된다. 신주가 종묘에 들어갈 때 그 공적을 기리며 이름을 짓는데 그것이 이른바 묘호(廟號)이다. 태조태종세종 등 역대 왕들의 묘호에서 보듯이 조선시대 국왕의 묘호는 두 글자로 지어졌다. 첫 글자는 임금의 업적을, 두 번째 글자는 종법상의 지위를 나타낸다. 예컨대 나라의 창업자는 태조(太祖)라는 묘호를 쓴다. ()는 주로 창업 개국자에게 주어지는 묘호이고 나머지 후대 왕들은 ()’자를 쓴다. 그런 이유로 중국의 역대 황제 가운데 창업자나 그 4대조 외에 자를 쓴 예는 거의 없었다.

 

 

세조의 경우도 원래 묘호로 거론된 것은 신종(神宗), 예종(睿宗), 성종(聖宗)이었다. 그러나 세조라는 묘호는 후대 왕인 예종이 고집하여 결정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사실 세조는 개국자가 아닌 계승자이므로 가 아닌 을 쓰는 것이 맞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조는 계승한 왕이라는 ()’자와 나라를 세운 왕이라는()’자를 모두 가진 왕이 되었다. 이런 경우는 세조 외에도 선조나 인조가 있는데 대체로 후대에 무리하게 묘호를 붙인 결과라 볼 수 있다.

 

비록 세조라는 묘호는 세조 자신이 작명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평범치 않은 이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세조의 특별함은 묘호만이 아니다. 세조와 그와 함께한 공신들은 국가 재건의 공로가 공식적으로 인정되었고 세조는 종묘에서 아무리 대수가 달라져도 결코 신주가 옮겨지지 않는 불천위(不遷位)의 지위를 가졌다.

 

세조글 정성희 / 실학박물관 학예연구사

글쓴이 정성희는 역사연구가로 현재와 소통하는 살아있는 역사를 발굴해내는 일에 전념하고 있으며, 현재는 ‘21세기와 실학이라는 주제에 관한 저술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