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왕조 조선의 설계자
정도전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은 고려에서 조선으로 교체되는 격동의 시기에 역사의 중심에서 새 왕조를 설계한 인물이었다.(고려의 망국과 조선의 개국으로 이어지는 전환점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
그러나 자신이 꿈꾸던 성리학적 이상세계의 실현을 보지 못하고 끝내는 정적(이방원 세력)의 칼에 단죄되어 조선 왕조의 끝자락(고종때)에 가서야 겨우 신원 되는 극단적인 삶을 살았다
이를테면 함경도 변방의 일개 무장에 지나지 않는 이성계를 중앙 권력의 핵심으로 끌어드린 주역이 바로 정도전이기 때문이다. 정도전은 현대적 입장에서 보았을 때도 무척 앞선 민본사상가(民本思想家)로 그의 역성혁명과 조선개국을 주도한 것도 내면적으로 볼 때 이씨왕조(李氏王朝)를 위함이 아니기에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하고 조선 500년 역사에서 이방인으로 남았는지 모른다
백성의 삶 속에서 미래를 설계
정도전의 집안은 본래 봉화 지역의 향리였다. 고려시대까지 향리는 우리가 아는 조선조의 향리와는 그 격이 달라, 지방의 토착세력을 말한다. 정도전 집안은 경상도 봉화지역의 토착세력인 셈이다. 부친 정운경의 뒤를 이어 과거에 급제한 정도전은 22살 때 충주사록에 임명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또한 정도전은 공민왕의 유학 육성 사업에 참여해 성균관 교관에 임명되었다. 이때 우리에게 잘 알려진 정몽주∙이숭인 등도 함께 참여하였다. 그러나 공민왕이 측근에 의하여 갑작스럽게 죽음으로서 정도전에게는 시련의 시작이었다.
공민왕의 뒤를 이어 우왕이 즉위하였는데, 우왕이 재위하던 때는 정도전과 정치적 성향이 다른 이인임,최영 등이 정국을 주도하였다. 양측의 충돌은 불가피하였고, 결국 원나라 사신의 마중을 거부하였다는 이유로 정도전은 오늘날의 전라도 나주에 속해 있는 회진현에서 유배 생활을 하게 되었다.
회진현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정도전은 그곳에서 백성들의 삶을 직접 목격하고는 위민의식(爲民意識)을 키웠다.
정도전이 회진현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어느 날, 들녘에서 한 농부를 만났다. 그 농부는 정도전을 보고 당시 관리들이 ‘국가의 안위와 민생의 안락과 근심, 시정의 득실, 풍속의 좋고 나쁨’에 뜻을 두지 않으면서 헛되이 녹봉만 축내고 있다며 질책하였다.
촌로의 이러한 발언은 정도전에게 백성을 위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다시 마음에 새기는 계기가 되기 충분하였을 것이다. 결국 그가 제시했던 민본사상은 허울 좋은 이름뿐이 아니었다. 실제 백성의 삶을 목격한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으로 진정성이 담보된 것이었다
도담삼봉에 있는 정도전 동상
천명을 읽고 장자방을 자처하다
계속된 정치적 시련에 대장부의 거대한 야망이 꺾일 만도 하지만, 오히려 정도전은 더욱 강해졌다. 관직에 다시 등용된 정도전은 전의부령, 성균좨주 등의 관직을 지내다가, 이성계의 추천으로, 성균대사성에 임명되었다.
성균대사성은 성균관의 책임자를 말하는데, 당시 학계를 주도하는 위치에 오르게 된 것이었다.
사실 이성계와 정도전의 만남은 그보다 앞선 1384년(우왕 10년)에 이루어졌다.
관직에서 물러나 있던 정도전이 여진족 호발도의 침입을 막기 위해 함경도에 있던 동북면도지휘사 이성계를 찾아가면서부터였다. 이성계의 군대를 본 정도전은, 이성계가 자신의 포부를 실현해줄 것으로 확신하였다. 그리고는 군영 앞에 서 있던 노송에 아래와 같은 시를 남겨 놓았다.
아득한 세월에 한 그루 소나무
푸른 산 몇만 겹 속에 자랐구나
잘 있다가 다른 해에 만나볼 수 있을까
인간을 굽어보며 묵은 자취를 남겼구나
이 시에 대해 조선 초에 만들어진 [용비어천가]에서는 정도전이 이미 천명의 소재를 알고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정도전은 평소 취중에 “한나라 고조가 장자방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장자방이 한고조를 이용하였다.”라고 말하고는 하였다. 한고조를 이성계에 대비한 것인데, 그렇다면 결국 자신이 이성계를 이용했다는 말이 된다.
한 대장부의 거대한 야망을 느끼게 한다.
정몽주와 정도전
정몽주와 정도전의 개혁 의지는 같지만 정몽주는 고려 왕조를 지켜서 개혁을 하려고 했고, 정도전은 썩어빠진 고려를 뒤집어 새로운 왕조를 세우려고 했던 것이다. 여기서 정몽주와 정도전의 정치관이 극열하게 차이나는 점은 왕권에 대한 의식의 출발점이다.
정도전은 왕권도 신권(臣權)에 의해 이루어 진다는 생각인 반면에 정몽주는 신권은 충(忠)으로부터 출발한다는 순수한 유교정신이 바탕이었다
포은 정몽주는 고려의 개혁에 정도전과 함께하였으나, 급진세력인 남은,조준,정도전 등과는 생각의 차이가 있었다. 급진세력들에게는 유교적 왕도정치를 위해서라면 고려왕조를 없애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역성혁명을 감행하여 이성계를 왕으로 옹립하고 철저한 유교사회를 건설하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정몽주,이숭인, 이종학 등의 온건개혁파들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은 고려왕조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순차적으로 개혁을 실시하여 사회전반에 무리가 없도록 하는 것이 신하의 도리라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정몽주 등 온건파들이 먼저 급진파를 제거하려고 1392년 3월 이성계가 사냥터에서 낙마하여 중상을 입고 등청을 못한 사이에 정몽주가 조준, 남은, 정도전, 남재, 조박, 오사충 등 급진파를 탄핵하여 유배시켜 버렸다. 이에 이성계는 병중에 가마로 개경으로 돌아오고, 이방원은 위기의식을 느껴 간을 떠 본뒤 조영규 등 수하에게 정몽주를 살해하도록 하였다. 이에 더 나아가 조준은 역성혁명에 걸림돌이 되는 나머지 세력들을 몰아내고 정도전을 중책에 앉혔다. 그리하여 급진파들은 힘으로 1392년 7월에 공양왕을 폐위시키고 역성혁명을 성공시켰다. . 그러나 역사는 흘러 정도전도 가장 총애한 이방원에게 왕권을 넘본다는 빌미로 살해되고 만다.
정몽주와 이방원
고려 왕조를 끝까지 지키려고 몸부림치던 정몽주에게 이성계 일파를 제거할 기회가 딱 한 번 있었어.
이성계가 해주에서 사냥을 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몸을 크게 다친 적이 있었지. 그래서 개경에 오지 못하고 벽란도에서 요양을 하고 있었어. 이때 정몽주는 하늘이 준 기회라 여기며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 했어.
그러나 정몽주의 계획은 이방원 때문에 틀어져 버렸어.
절체절명의 위기라고 생각한 방원이 한밤중에 벽란도로 달려가서 이성계를 개경까지 데려왔던 거지.
정몽주는 크게 실망했어. 그러나 이성계의 몸 상태가 어느 정도인지 알아야 다음 일을 계획할 수 있기에, 이성계의 병문안을 핑계로 호랑이 굴이나 다름없는 이성계의 집으로 스스로 찾아갔어.
고려의 마지막 기운이 느껴지던 어느 날 이방원과 정몽주가 술상을 앞에 놓고 자리하였다.
그리고 방원 자신의 야망 실현에 걸림돌이 되었던 정몽주를 회유하기 위해 이방원은 먼저 시 한 수를 읊었다.
그게 바로 유명한 하여가(何如歌)야.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서 백 년까지 누리리라
정몽주에게 고려 왕조에 대한 절개를 굽힐 것을 전한 것이며, 자신의 뜻에 동참하라는 것이었다.
이방원다운 솔직하고도 직설적인 표현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고단한 인생 살지 말고, 우리 편에 붙어서 서로 사이좋게 영원히 살아가자는 회유였지.
그러자 정몽주가 이방원이 따라주는 술 한 잔을 받아 들고는 다음과 같이 단심가(丹心歌)로 화답하였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나는 백 번을 다시 죽어도 고려 왕조를 섬길 것이니, 나를 설득할 생각을 버리라는 준엄한 경고였어.
정몽주의 고려 왕조에 대한 일편단심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이전부터 정몽주의 마음을 돌리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이방원이었기에 더 이상의 설득은 무의미 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후 이방원은 심복 조영규를 통해 선지교(후에 선죽교로 이름이 바뀜)에서 정몽주를 살해, 피살되면서 그를 추종하는 세력은 궤멸하였고 이제는 그야말로 이성계 천하가 된 것이었다. 이로써 새로운 왕조의 건국은 급물살을 타게 되었다.
조선 왕조를 설계하다
위화도회군으로 이성계가 권력의 핵심으로 부상하면서 정도전의 야망은 급물살을 탔다.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 때 고려 조정에는 한편에 정몽주를 중심으로 한 온건세력이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정도전, 조준과 같이 급진적 개혁세력이 있었다. 이성계가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그는 이미 급진적 개혁세력의 맹주가 되어 있었다.
정몽주가 피살된 후 이성계를 추대하려는 세력의 움직임이 가속화되어 드디어 1392년, 5백 년 고려 왕조는 역사 속에서 종말을 고하고, 새로운 조선 왕조가 들어섰다. 조선이 개국된 후 정도전의 활약은 눈부셨다.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하는 과정을 비롯해 현재의 경복궁 및 도성 자리를 정하였고, 수도 건설 공사의 총책임자로 임무를 수행하였다. 수도 건설이 마무리되면서는 경복궁을 비롯한 성문의 이름과 한성부의 5부 52방 이름도 지었다. 서울을 구성하던 각종 상징물에 의미를 부여하였는데, 대부분 유교의 덕목이나 가치가 담긴 표현이었다. 서울이 수도로서의 의미만이 아닌 유교적 이상을 담은 곳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었다
그는 또한 [조선경국전]을 지어 태조에게 올렸다. 이 책은 조선의 통치규범을 제시한 것으로 후일 조선의 최고
법전인 [경국대전]이 나오게 되는 출발이었다. 이 책에서 정도전은 자신이 꿈꾸던 요순시대를 건설하기 위한 거대한 정치 구상을 제시하였다. 요순시대처럼 임금과 신하가 서로 조화를 이루는 왕도정치를 전면적으로 표방한 것이었다.
정도전과 이방원
정도전은 개국 후 태조의 두 번째 부인인 신덕왕후 강씨 소생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는 문제에 관여하였다. 태조에게는 두 명의 부인이 있었다. 첫째는 신의왕후 한씨이고, 둘째가 신덕왕후 강씨였다. 신의왕후 소생 아들로는 방우∙방과(정종)∙방의∙방간∙방원(태종)∙방연 등이 있었다. 이들은 신덕왕후 소생의 아들보다도 아버지 태조가 왕위에 오르는 데 공도 많았다. 그런데 정도전이 이를 다 무시하고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게 하였던 것이었다.
정몽주를 선지교에서 살해함으로써 조선 건국이 가속화되는 계기를 만들었던 이방원등 첫째 부인 한씨 소생들의 불만이 커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더구나 정도전과 사병 혁파 문제로 서로 갈등을 보이던 중 1398년(태조 7년) 제1치 왕자의난이 발생하였고, 정도전은 이방원이 이끄는 세력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그리고 정도전은 조선조 내내 신원 되지 않다가 고종 때 관직이 회복되었다. 고종 때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건국 초에 설계 등에 참여한 정도전의 공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제1차 왕자의 난 발생 원인은 개인적인 불만이 표출된 것이기도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이방원과 정도전이 가지고 있던 정치적 이상의 차이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즉 국가체제를 어떻게 편제하고 운영할 것인가의 차이인 것이다. 정도전이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꾀하는 이상적인 왕도정치를 표방하였다면, 이방원은 그와는 달리 강력한 왕권에 바탕을 둔 왕조국가를 지향했기 때문이었다. 이상과 현실의 갈등에서 현실이 우세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사림들이 집권하게 되면서 정도전이 꿈꾸던 이상세계가 구현되어 갔으니, 정도전의 꿈은 꿈에서 그친 것이 아니리라….
욕망을 성취한 이방원(조선 3대 왕 태종)
태종(太宗, 1367~1422, 재위 1400~1418)은 새 왕조 개창기에 많은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정도전 등에 의해서 견제되었다. 제1차 왕자의 난을 계기로 재기에 성공, 그러나 왕위에 오르는 과정이나 왕위에 오른 뒤 계속된 피의 숙청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한편에서 보면 그는 500년 조선조 국가 운영의 밑그림을 완성한 군왕이었다.
이성계의 다섯 번째 아들로 태어난 이방원, 그는 무장 가문이었던 이성계 가문의 유일한 문과급제자로 어려서 부터 부친의 희망이었다. 이방원은 정몽주을 처치하는 거사가 성공한 뒤 남은∙정도전∙조준 등 52인과 이성계의 추대를 협의하고, 공민왕비 안씨를 움직여 수창궁에서 즉위하게 하였다. 새로운 왕조의 시작으로, 이방원은 중요한 고비마다 그 중심에 있었다.
개국의 공로가 묻혀 버린 좌절의 순간들
새 왕조를 개창한 뒤 아마도 이방원은 부왕의 등극에 절대적인 공헌을 하였고 개인적인 능력이나 중망으로 보아 자신이 후계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은 그에게 좌절의 아픔을 주었다. 그 첫 좌절이 태조 초에 이루어진 개국공신의 선정과정에서 누락된 것이었다. 개국공신의 선정을 주도한 태조가 공은 인정하되 친자(親子)이기 때문에 공신 선정에서 제외시켰다. 왕자 신분이 되면서 정치적, 사회적으로 누릴 수 있는 특권을 가졌을 것이지만 개국공신의 선정에서 제외된 것은 그것이 갖는 상징적인 의미를 두고 볼 때 이방원에게는 서운한 일이었다. 그래서인지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정종이 즉위한 뒤 자신을 비롯해 방의∙방간 두 형을 개국 1등 공신에 추가로 선정하기도 하였다.
이방원은 이후에도 계속 정치에서 소외되며 정도전 등에 의해 견제되었다. 새 왕조가 들어선 후 얼마 지나지 않은 1392년 8월, 정도전 등이 중심이 되어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의 막내 아들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방석을 세자로 책봉할 당시 배극렴은 “시국이 평온할 때에는 적자를 세우고, 세상이 어지러울 때에는 먼저 공 있는 자를 세워야 합니다.”라고 하여, 이방원을 지지하는 듯한 발언을 하기도 하였으나, 끝내 이방원은 세자 책봉에서 소외되었다. 더하여 정도전은 중국의 예를 들어 모든 왕자를 각도에 나누어 보내자고 청하기도 하였고, 명나라와 외교적이 마찰이 생기면서 진법 훈련을 실시하면 왕자 및 공신들이 거느리고 사병을 혁파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방원을 비롯한 정적들이 보유하고 있는 무력 기반을 약화시키려는 차원이었다.
새로운 왕조 조선의 기틀을 마련하다
좌절의 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제1차 왕자의 난으로 그야말로 이방원의 시대가 열렸다. 새로운 시대는 그냥 오지 않는 것, 준비된 자만이 얻을 수 있는 영광이었다. 이방원과 그 주위 사람들은 좌절의 시기에 앞으로 다가올 재기의 순간을 위해 철저하게 준비하였다. 먼저 본인과 부인을 중심으로 지속적으로 사병을 육성하거나 후일을 도모할 준비를 하였고, 여기에 당대 최고의 책사라고 할 수 있는 하륜과의 만남은 이방원에게 큰 힘이 되었다. 하륜을 통해서 의형제를 맺은 이숙번과의 만남도 이루어졌다.
제1차 왕자의 난이후 권력의 대세는 이방원에게로 옮겨갔다. 이방원으로서도 바로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는 자칫 오해를 불러올 수 있었다. 정도전 등의 제거가 권력욕으로만 비추어진다면 여론이 좋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방원은 일단 당시 생존하고 있던 형들 가운데 맏형인 영안대군 방과(제일 맏형은 진안대군 방우였으나 이미 사망한 상태임)에게 왕위를 양보하니, 그가 조선 제2대 왕인 정종이었다. 영안대군에게는 많은 아들이 있었음에도 적장자가 없었던 점이 이방원에게 후일 자신의 입지를 다지는데 유리한 요소였다.
정종 즉위 후 방원 자신은 세자로 책봉되었고, 정종이 재위 2년 만에 왕위에서 물러나면서 그 자리를 이방원이 차지하게 되니, 그가 바로 태종이었다.
태종은 왕세자 시절 사병을 혁파하였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앞서 정도전이 사병을 혁파하려고 할 때 반발하던 그가 왕위에 올라서는 이를 혁파하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사병은 왕권에 위협되는 요소였으므로 태종도 자신의 권력 강화를 위해서는 혁파해야만 하였다. 왕위에 오른 태종은 왕조국가에 맞는 여러 시스템을 정비하기 시작하였다. 이어 국가의 행정체계를 정비하여 6조 중심의 행정체계를 완성하여 자신의 국정 장악력을 강화하였다. 이 밖에도 오늘날 지방제도의 근간이 되는 8도 체제를 정비하였고, 서얼의 관직 진출 등을 제한하는 서얼차대법을 제정하였으며, 국가 운영의 필수인 인구나 군적 파악을 위해 호적법을 정비하였다. 이러한 제도들은 이후 조선조 운영의 근간이 되는 것이었다.
피의 숙청과 수성을 위한 비장한 선택
태종은 국가 운영을 위한 제도를 정비함과 동시에 자신의 왕권에 도전하거나 또는 도전할 소지가 있는 세력들을 하나둘 축출하였다. 가장 먼저 태종의 눈에 가시가 되었던 인물이 이거이였다. 태조 대 무장으로, 그리고 태종과 혼인관계가 있던 이거이였으나 사병혁파에 반대했다는 이유에서 제거되었다. 이거이는 당대 가장 많은 사병을 거느렸던 인물이었다. 이어 태종의 공격 화살은 자신을 그토록 도왔던 원경왕후의 집안으로 겨냥되었다.
외척으로 그리고 태종을 도와 왕위에 오르는데 큰 공을 세운 이들이었기에 그 권력은 하늘 높은 줄 몰랐다.
그러나 1406년(태종 6년)과 1409년 두 차례 왕위를 넘겨주겠다는 전위 표명 과정과 1415년을 거치면서 결국 원경왕후의 4형제가 모두 죽음을 맞이하였다. 세자를 끼고 권력을 행사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야말로 피의 숙청의 연속이었다.
태종은 생전인 1418년(태종 18년) 8월에 왕위를 세종에게 물려주었다. 이 과정에서 태종은 아버지로서 비장한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왕위를 물려주기 2개월 전에 있었던 일로, 장자인 세자 양녕대군을 폐위시키고, 대신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하였던 것이었다. 당시 의정부를 비롯해 6조 등 조정의 많은 관원들이 양녕대군의 잘못을 논하면서 “만세(萬世)의 대계(大計)”를 위해 폐위시키기를 요청하였다. 어렵게 세운 왕조의 수성을 위해서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관리들이 세자의 폐위에 대해 논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목숨을 담보로 한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국왕과 교감이 없었다면 쉽지 않은 일이었으리라.
신하들의 요청을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이루어진 왕세자의 폐위에 대해 태종은 천명임을 강조하면서 후계자를 어진 이로 삼는 것은 고금의 대의라고 하며 그 정당성을 말하였다. 그 일이 비록 정당하다고는 하지만, 아비되는 입장에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실록에서는 당시 태종의 심정을 “임금이 통곡하여 흐느끼다가 목이 메이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아무리 냉철한이라도 이 상황에서 심적인 동요가 없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