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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저널/풍수와 정조이야기

풍수와 정조편 2부

by jaky7080 2013. 11. 7.

풍수와 정조편 2부

 

 

영조는 죽으면 자신의 부인 정성왕후묘(서오릉내 홍릉) 옆에 묻히길 원했고

그래서 그 옆자리에 생전에 신후지지로 묘자리를 정해논겨,,,,

 

신후지지란 죽어서 들어갈 자리를 살아서 미리 정해 놓는걸 말하는겨,,,,

 

그런데 정조가 서오릉내 홍릉자리를 전격으로 돌려서 동구릉 태조건원능에 있는 서쪽자리로 옮긴겨,,,

경기 구리시에 있는 그 자리가 어떤 자리냐 하면,,,

앞에  윤선도가 10년 예언설을 해서 문제가 생겨서 효종무덤을 세종옆으로 옮겼잖어,,,,

천장을 하기전 문제가 생겨서 효종을 파묘 했던 그자린겨,,,,

충격이 아닐수 없는겨,,, 그 자리에 할아버지를 옮긴겨,,,

 

그런데 당시 노론들이 말을 할 수 없는 것이 그 자리를 지들 노론의 영수였던

송시열이가 극찬을 하며 추천했던 자리인겨,,,

역사가 이런겨 ,,,참말로 재미난겨,,,,

지금 와서 그 자리 드럽다고 말을 할 수도 없는겨,, ㅋㅋㅋ

 

정조가 더 좋은 자리를 찾아보라고 하면서 보낸 신하들이

김양택, 이은, 김기량, 김상현등인데 여기서 영의정 김양택이가 송시열의 제자인겨,,,

그런데 김양택이 마저도 극찬을 하고 왕릉 선정에 관계된 모든 신하가 만장일치를 하는겨,,

당연히 다른 누가 반대할 이유가 없는겨,,, 그래서 그 자리에 묘자리를 쓰기는 했는데,,

여기서 이제 핵심이 나오는겨,,,

 

첫째 

정조는 항상 풍수에서 만큼은 조선시대 역사에서

윤선도를 따를 자가 없고 풍수에서 만큼은 신의 눈을 가졌다고 칭찬을 했는데,,

그런 윤선도가 문제 제기를 했던 땅인겨,,,

 

둘째

영조가 살아 생전에 신후지지를 정할 때

파묘자리에 다시 능을 조성한 전례가 없다고 반대를 했었던 땅인겨,,,

 

세째 

파묘자리의 생기발복의 문제인데,,,

이게 100년전 파묘자리 잖어,,..

당시 임금들에 묘자리는 10자 깊이로 파는데,,,

열십자에 아래위 하면 임금왕이기에 당시 풍수에서 임금은 열자 깊이인겨,,,

그런데 열자 깊이의 파묘자리에 다시 묘를 쓴 다는건 생기가 빠져버린 혈자리라

풍수적으로 맞지를 않는 자리인겨,,,

 

 

그런데 도대체 왜 정조가 영조의 유지대로 하지 않고

다른 자리를 알아보게 했으며 그 밑에  신하들이

당파를 떠나서 파묘자리를 만장일치를 했냐 이거여 ??,,

앞전에 말했지만 정조는 다른 것도 능했지만 풍수에 무지 능한 사람이거덩,,,,

 

그런 그가 왜이랬을까 ??,,

 

단하나,,

정조 역시 사람이기에 자신이 잘되어가기를 바라지 잘못되기를 바라지 않는다는거는 확실한겨,,

왜이렇게 했는지에 대해서는 정조 자신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알 수는 없지만

여러가지 정황으로 추론은 해볼수 있는겨,,,

  

앞전에 효종이 처음 들어갈 자리를 윤선도는 수원화성으로 추천한겨,,,

현종, 숙종, 경종을 거쳐서 영조인데,,,

 

원래 대로라면 사도세자가 왕이 되어야 하는겨,,,

윤선도는 남인인겨,,

윤선도의 추천을 따랐다면 소론과 남인들이 발하고 즉 아버지 사도세자까지 무난히 왕이되는

발복을 받았을 수 있다고 본겨,,,

하지만 소론과 남인은 풍지 박살이나고 노론이 득세를 하고 아버지 사도세자는 죽은겨,,,,

영조가 신후지지로 정했던 정성왕후 옆자리는 산에 얼굴이 아닌 등쪽이라

풍수적으로 정조 자신이 배척을 받는 묘자리로 본겨,,,

 

그래서 파묘자리에 영조를 모시면 생기가 죽은 혈자리라

발복을 받지 못해서 세력이 뒤집힐 수 있다는걸 염두에 둔거고

 

향후 정조 자신이 추진하는 개혁에 발복을 받기 위해서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100여전 윤선도가 극찬을 했던 그 수원 화성땅으로 옮기면 자신이

그 발복을 고스란히 받을수 있다고 본겨,,,

내가 정조가 아니라 정확하다고는 말 못하지만 가장 타당하다고 보는겨,,,

 

여기서 현재 보수의 진객들은 이 실록을 다음과 같이 좋게(?)해석하는겨,,

파묘자리에 할아버지를 모신게 정조의 불안한 운명과 정국 운영의 시작으로

정조의 목숨을 노린 자객의 침입, 역변, 나이 서른이 넘어 얻은 유일한 아들 문효세자와

그 생모의 잇따른 죽음 등 개인적으로뿐만 아니라 국가적으로도 불안과 불행의 연속이다고,,,

 

어쨌든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옮기기 위해서 풍수 공부도 더욱 많이 하고

다른 곳들도 더 많이 둘러보면서 결국 최고의 명당은 수원화성이라고 본겨,,

하여 즉위 13년만에 아버지묘를 천장한겨,,,

그리고 수원 읍지소까지 화성으로 같이 옮겨버린겨,,,

그래서 새로운 수원이 이때 탄생되는겨,,,,

여기까지의 거리가 88리 인데 정조는 꾸준히 여기 수원으로 능행을한겨,,,

 

그리고 정조 야그에 정약용이 빠지면 섭섭한겨,,,

정조는 정약용을 시켜서 화성도 지은겨,,, 요거이 오늘날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건 알지 ??,,

 

당시에 화성천도설까지 나 돌았지만 화성으로 천도해야 한다는 기록은 없어,,

하지만 언젠가는 그렇게 될거라고 정조는 생각혔을수도 있다고는 보는겨,,,

 

                                                          수원화성

 

 

 

정조는 조선의 르네상스를 연 왕으로 칭송 받는데,,,

 

사실이 그런겨,,,

성리학, 문학, 과학, 역학, 의학, 예술등등에 모르는것이 없는겨,,

직접 규장각 문신들을 가르치기도 할 정도로 아주 다방면으로 뛰어난겨,,

 

정조가 조금만 더 살았으면 오늘날 역사가 바뀐겨,,,

 

거기에 생각자체도 혁신적이고,,,

무엇을 받아들이는데 주저함이 없고 엄청난 양의 도서를 편찬하고

신분도 완화시키거나 철폐하려 하면서 똑똑한 넘은 지위를 떠나 등용하려하고

그래서 실학자들이 대거 등용도 되고 이 실학자들이 조선의 문물을 업그레이드하고

더 나아가 상업과 공업의 장려까지 나아가는 토대를 마련하는겨,,,

무과도 자주 열어서 무인들도 등용시키는데 직접 무과시험을 감독하기도 하는겨,,,

 

그랬더니 어떻게 되느겨 ??,,

그나마 양반들중에서 조금 뛰어나면 오르던 벼슬길도

정조의 신분 완화로 경쟁률도 올라가는데 그 넘들이 또 왜케 그렇게 똑똑한겨,,,ㅜㅜ

노론들은 줄만 잘타면 출세도 장사도 보장되니 뒷돈도 쏠쏠하게 챙겼는데

뒷돈 챙겨주는 넘들도 점점 줄어들고 한마디로 불황인겨,,,ㅋㅋㅋ

 

너무도 당연하지만 세력을 잡고있는 노론 기득권층은 똥줄이 타는겨,,,

그래서 사사건건 반대를 하고 트집을 잡고 난리도 아닌겨,,,

 

특히 정조는 스스로로 부터 무예 실력까지 쌓으면서 무과로 등용된

젊은애들을 중심으로 30명으로 구성된 정조 호위군대 장용영을 만드는겨,,,

이게 훗날 만명도 넘게되는겨,,

그야 말로 노론세력들은 불안혀서 미치고 팔딱 뛰는겨,,,

 

내 말혔잖어 아버지 사도세자가 문무에 탁월한 엄친아 였다고,,,

그 씨앗이 어디 가는겨 ??,, 정조 줏어 왔어 ,,?? ㅋㅋㅋ

 

이러다 이제 일이 터지는겨,,,

강해진 자신의 입지를 바탕으로 정조가 슬슬 전면전으로 가는겨,,,

 

정조가 죽기 한달전 부터 강하게 대숙청을 짐작케 하는 말들을 쏟아내는겨,,,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된자들은 용서를 빌라고도 말혔고,,

또한 당시 노론 당수 심환지한테  경고도 한겨,,,

 

"조정에서는 두려울() 자가 있는지 알지못하니

 나의 화기가 어찌 더하지 아니할수있는가"

이런말도 한겨 이말인즉,, 더이상 참기힘들 만큼 까분다 이런 뜻인거지,,,

이런 말들과 함께 남인 출신들 정약용 이가환 등을

재상으로 등용하겟다는 뜻도 밝히는겨,,,

한마디로 기득권 노론을 다 밀어내는 대숙청을 하겠다는거나 마찬가지지,,,

 

바로 이날부터 약 10여일후에 정조가 급작스럽게 죽어버려,,,

그래서 독살설이 나오는겨,,,

정조가 앓아 누워 위급할 때 정순왕후는 모든 신하들을 물리고

혼자 있었는데 이 야그는 실록에 기록된 부분인겨,,,

이게 당시 조선 예법에 절대 있을수 없는 일인데 혼자 임종을 지켰다는겨,,,

친하지도 않으면서  임종을 지켜야 할 관계도 아니고 왜 그런겨 ??

 

난 독살설이 타당해 보인다고 보는 견해중에 한사람인데

왜냐하면 바로 그것은 정조의 묘자리 풍수로 가는겨,,,

내가 앞에 말했잖혀,,,기록은 승자편에서 거짓으로 할수있다고,,,

하지만 풍수는 땅을 없애고 산을 옮기지 못하는 한 거짓말 할 수 없다고,,,

 

정조가 왕권 강화를 괜히 했어 ??,,

자신의 이상 국가 건설로 가기 위해서는 기득권 부패세력

노론을 조정에서 밀어내야만 하는겨,,

위에 쭉 써준 좋은 조선 잘나가는 조선을 만들기 위해서는 필요 할 수밖에 없는겨,,

하지만 이전까지는 노론을 내칠수 있는 힘이 정조에겐 없는겨,,,

정조가 이제 한판뜰 때 되었다고 생각하고 대숙청을 예고했는데,,

그리고 나서 갑작스럽게 죽어버리고,,,

그 이후에 정조의 묘자리 까지 이장 당하고 보면 당연한 답이라는겨,,,

 

최근에 정조의 독살 주범으로 알려진 노론 당수 심환지와 정조의 편지 내용이 발견되어 공개 되면서

독살설이 허구라는 뒷받침에 증거가 될수있다고 하는데,,,

또한 정조와 정순왕후와의 관계가 특히 나빳다고 볼 수 있는 실록에 기록이 전혀 없다 등등,,,

이런 소릴 하는데,, 참 내 이게 더 어이 없는겨,,,

 

정순왕후는 정조 죽고 어린 순조 내세워서 수렴청정을 하면서 당연히 다시 노론이 더욱 득세를 하게되는겨,,

재상으로 거론되었던 이가환은 옥사하고 정약용 박제가등등은 유배되고 그 외에 정조가 등용한 인재들은

다 죽거나 유배되거나 물러나고,,

정조가 추진한 개혁사업들이 물거품이되어 사라지는겨,,,

또한 정조때 숙청되었던 인물들이 모두 복권되는겨,,,

 

너무 친하고 평소에 서로 신뢰가 투터워서 노론이 정조한테 이런겨 ??,,

이걸 그 편지 내용으로 믿어 주어야 하는 사이라고 봐야 하는겨 ??,,ㅋㅋ

이 노인네는 절대 못 믿는겨,,,ㅋㅋ

 

 

어쨋든 정조 죽고 다시 노론이 득세하면서 나라가 산으로 바다로 가는겨,,,

그 많은 개혁을 통해서 그렇게 부패를 줄여가면서 살기 좋아지던 조선이

그디어 패망국으로 슬슬 접어드는겨,,,

 

왜, 그거 있잖어 나폴레옹,,,

존나게 올라갔더니,,

이 산이 아닌가벼~~ ㅋㅋㅋ

다른 산에 올라가면 ,,,

아까 그 산이 맞는가벼 !! ㅋㅋㅋ

오락가락 지랄을 떨면서 나라가 기울기 시작하는 거야 지들 빼고 모조리  망혀,,,

 

 

    수원화성의 정조비 

 

내가 보는 정조는 무척 심지가 굳은 사람이여,,,

어릴적 부터 아버지 죽음을 지켜보면서 왕이되기까지

이빨을 감춰야만 살 수 있다는 걸 터득한겨,,

절대 자기가 약 햇을때 이빨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인겨,,,

그래서 이빨을 드러낼 수 있을 만큼 정조는 입지 강화에 힘을 쓴겨,,

그리고 이제 됐다 싶어 대숙청을 예고한겨,,,

 

그 앞전에 누구랑 사실은 친하게 지냈다,,,

편지를 주고 받았고 그 내용이 어떻다,,,

이런 건 독살설을 잠재울 수 있는 증거가 절대 될수 없는겨,,,

정조가 이빨을 감추고 그동안 그렇게 해 왔다는게 내 눈에 보이는겨,,,

 

증거 다운 증거는 바로 정조대왕의 묘자리인겨,,,,

다시 한번 말하지만 풍수는 거짓 기록을 할 수 없는거고,,,

 

 

보라고 사도세자를 모함하여 죽임을 하는데 앞장 섰고 정조의 죽음과도 뭔가가 냄새를 풍기는

이가 있으니 바로 정순왕후인겨,,,,

그의 나이는 사도세자 보다 어렸고 영조보다 51살이나 어린女를 계비로 맞이하였기에 조선 후기 역사는...

 

정순왕후는 영조가 죽고도 그 아들의 손자, 증손자인 순조 때까지 오래오래 살면서 대비로서 실권을 행사하며

시파탄압, 정조사후 정약용 혁파, 신유박해로 남인 축출등을 주도하게 되는겨,,,

 

후에 순조의 비로 김조순의 딸을 맞이 하는데 힘을 써, 안동김씨가 세력을 펼치는데 일조하기도 하는겨,,,

그리고 그 김조순은 장인인 정조가 사도세자 묘의 동쪽 언덕에 매장해 달라 유언하여 그 곳에 묻혔으나

자신의 딸이 왕비가 된 후, 건릉이 풍수지리상 좋지 않다 하여 융릉의 서쪽으로 이장시켜버리는겨,,,

 

정조는 아비묘 옆에 묘자리를 마련하였는데 자신이 이장 될 것을 상상이나 했을까? 

 

이 건릉이 어떤 자리 인가는 앞에서 야그 하였음, 이렇듯 정조묘를 갖고 장난을 친거 보면 독살설이 맞는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