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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저널/풍수와 정조이야기

풍수와 정조편 3부

by jaky7080 2013. 11. 7.

풍수와 정조편 3부

 

 

 

때는 조선 1700년대 후반 ,,,

조선시대에 가장 안타까운 순간이 있었으니,,,

그것은,,,

차마 못다핀 조선의 르네상스 였다.~

조선의 모든 실학자가 정조를 기리며 슬픔에,,,,

 

기존의 틀에 스스로를 묶어두고,,,

다른건 다 필요없고 오직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틀의 밑에서만 공기밥 하나로 경제적 행복 추구를

하라는 기득권 세력의 사람들이 있었던겨,,, 그것도 풍년일때만 한공기,,,

 

그틀을 깨고 나가야만 로보트 태권브이를 만들어 농사 지어서 끼니당 공기밥 하나를

 추가 할 수 있고 그래서 경제적으로 행복해질 수 있고 더 나아가서 로보트 태권브이를

대량 생산체제로 해서 수출로,,,

 

농사 안 짓고도 공기밥 세공기까지 가능 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던겨,,,ㅋㅋ 

누구냐 하면 박제가,,,

지금으로 부터 250년전 사람인데

이 사람의 책이나 기록들 또 말하고 다니는걸 들어보면 요즈음으로 치면 무슨 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

같은 소리를 하고 다니는겨,,, 이게 몬 소리냐고 ??

한마디로 안탑깝다는거지,,,

 

아래 내용들은 책 내용들을 자세히 언급 할 수는 없는겨

그래서 개념 이해에 필요한 것만 말하는 거니까

참고들 하고 배려하고 읽어주어야 하는 사명이 독자들한테 있는겨,,,ㅋㅋ

 

정조가 오래 살아서 하고자 하는 개혁이 성공 되었다면, 

그래서 이런 실학자들이 계속 뻗어 나갔다면 지금 쯤,

 

한국이 아닌 조선이란 이름으로 세계 경쟁력은 1~2위를 다툴거라고 난 생각혀,,,

그런 아쉬움에 잠시 써보는겨,,,

 

박제가의 어린시절 기록들을 보면 너무 영특한게 아버지로서는 늘 그게 부담이였던겨,,,

왜냐하면 서자 출신이라 대과를 볼 수가 없거든,,,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버지마져 죽고 누가 서자를 돌봐 줘,,

어머니랑 셋방 전전하면서 삯바느질 밑에서 독학해 나가는거지,,,

문제는 독학을 한다 해도 밥벌이를 할수가 없는데,,, 벼슬길에 오를수가 없잖어,,,

그런 시간 뒤에 아들을 위해 꿋꿋이 헌신한 훌륭한 어머니가 있는거지,,

 

그러다 자신과 뜻이 맞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겨,, 그중에서도 박지원,,,

이때 부터 박지원은 학문의 동지이자 스승인데,,,

이 실학자들의 대체적 공통점은 숭명(崇明)을 뛰어 넘어서

청을 오랑캐로 보는것이 아니고 문물을 받아들여 배울것은 배우자 인겨,,,

 

요즈음도 이런 말 자주쓰지 ,,??,,

일본한테 배울것은 배우자 등등 쓰잖어,,,왜 모른척해 ㅋㅋㅋ

근데 현대를 살고있는 우리보다 저들이 먼져 쓴겨 ㅋㅋㅋ

실학자들이 먼저 특허 낸 유행어라 로열티주고 써야하는겨 ㅋㅋㅋ

 

노론이 득세하는 시절에  특히 박지원은 노론집압 출신임에도

이런 뜻으로 박제가랑 뭉쳤으니 내가 아는 노론중에 제일 훌륭한겨,,,

노론집압이면 숭명(崇明)중에 숭명인데 박지원과 박제가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사람인데, 죽을때까지 서로를 신뢰하지,,,

 

더더군다나 박지원은 나중에 양반 문벌체체의 비생산성을 비판하는데

자신의 출생과 가문의 틀을 깨는게 당시 사회로서는 무척 힘든 일인데 이사람도 난사람인겨,,,

 

 정조가 즉위하자 마자 그러니까 정조즉위 원년에 한 일이,,,

"반드시 조정의 진인들이 모두 옳은것은 아니고 초야의 인물들이 반드시 어리석은 것은 아니다"

따라서 서얼들도 벼슬길에 오를수 있는 법제를 만들라고 명한겨,,,

정조는 과연 멋진넘인겨,,,,,,

 

               정조대왕  초상화                                                    다산 정약용 초상화

  

 

 

 

당시에 숭명하는 조선의 일반적인 사대부 풍경에서 정조는 생각이 완전 파격적이라는거지,,,

파격이 올바른 쪽으로 파격이라 멋진넘이라 하는겨,,,

 

그래서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서이수를 정조가 발탁해서 규장각 검서관에 임명하는겨,,,

 

이들의 공톰점은 서얼이라는거,,,그리고 신분 때문에 벼슬길에 오르지 못했지만

학문과 실력으론 거의 최고라고 볼 수 있다는 거지,,,

그나마 좀 다른건 박제가는 서자이고 나머진 얼자라는거 정도,,ㅋㅋ

그게 그거지만,,,

 

 

그렇게 시간이 흘러서 하루는 정조가 국정 전반에 대한 자신들의 구상을 말해보라고 명명한 자리에서

청나라 와의 무역을 활성화 시켜서 나라의 가난을 구제할 것과 사족(士族)에게 장사를 시킬 것을 말한겨,,,

그러니까 먹고 노는 선비넘들이 늘어나고 하는 일 없는 선비넘들이 번성하는데

어떻게 나라가 부국해 지겠냐는겨,,,

당시 사()짜들 한테 장사하라는 말은 어떤건지 말안해도 알지 ,,??,,

 

참 생각해 보면 웃긴겨,,,

그 잘난 사()짜틀을 못깨서 후손들을 이렇게 개고생을 시키니 ,,ㅋㅋ

난 그래서 노론 이러면 자다가도 경끼하는겨,,,ㅋㅋ

  

그런데 문제는 이때까지 정조는 아직 사대부들과 싸울 힘이 없는겨,,

개혁의 틀을 잡아 나아가는 때라 노론을 깨고 넘어 갈 힘이 없는겨,,,

조선시대 사대부가 사농공상중에 공상을 어떻게 멸시했는지 알지 ??,,

당시로서는 힘들지만 차 후엔 정조는 그렇게 할라고 했지,,,

그래서 이런 똘똘한 애들을 계속 등용한거고,,

계속해서 청나라에 보내주는겨,,,

선진문물 배워오라고(요즈음 말로 글로벌 인재 육성책),,,

 

 

북학파(중상학파)들은 상공업을 발전시켜야 하며 절약을 통해 가난을 벗어나는게 아니고

활발한 생산과 공급의 확대로 소비의 촉진을 통해서 부국을 만들어야 하기에

적극적으로 발전 된 문물을 받아들이자인겨,,,

요즈음으로 치면 첨단기술로 무장한 무역국가로 가자는겨,,,

 

머리는 슈퍼펜티엄급으로 무쟈게 빠른 LTE 처리속도를 자랑하는데 

타고난 시대의 사회는 먹갈아 붓글씨로 받아 쓰겠다고 하고 있고,,,

 

그게 잘못 된 것인지 알면서도 내 받그릇 지키겠다고 수평선이 바다의 끝이라고 무지 우기고,

그렇게 하겠다고 힘쎈넘이 고집피는데 어떻게 말려,,, 누구를 탓해야 하는겨 ??ㅋㅋㅋ

 

머리만 똑똑하다고 다 되는건 아닌게 세상인건 알지만 그래도 아쉬운거지,,,

같은 시기에 일본은 그렇게 글로벌하게 나아가는데 왜 우리의 조선은 안되는겨,,,ㅜㅜ

 

이런 실학자들을 정조가 등용한 이유가 무엇인지,,,

왜 계속 사대부(노론)의 반발을사면서 까지 그 들을 밀어주는지,,,

바로 우리가 정조를 똑바로 알아야 하는 이유인겨,,,

 

이넘들은 명나라가 멸망한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숭명하며 죽지도 않고 조선 조정의 세력을 잡아서

밥 한공기 밖에 못먹게 하는지 참,,,

 

정조말엽까지도 조정이 어떤 분위기 이냐면 정조가 아버지묘에 행차했을때 박제가가 의자에 앉아 있는걸 보고

노론 실세 심환지가 수하시켜서 못앉게 한겨,,,

신분도 천한놈이 계급 좀 올랐다고 건방지다는거지 한마디로,,,

아무리 그래도 앉지도 못하는겨 ??,, ㅅㅂ ㅅㅂ ㅋㅋ

 

이때 박제가가 의자에 앉지도 못하냐면서 심환지와 한바탕 싸운겨,,,

근데 그거 같고 정조한테 심환지가 파직을 요청해,,,ㅋㅋ

그런데 정조가 딱 한마디 하는겨,,, "뭐 나무랄것이 있겠는가 "

이 한마디로 심환지 말을 씹은겨,,

 

그러나 몇년 후 이런 개혁이 꽃피우지 못하고 18006월 급작스럽게 죽은겨,,,

그리고 박제가는 정조 죽고 증거도 없이 노론들한테 윤가기 흉서사건에 연좌 당해서

죽을날만 기다리게 되는겨,,, 윤가기가 단지 사돈이라는 이유만으로,,,

다행히 죽지는 않고 유배로 끝났는데 유배갔다와서 골병들어 몇 달만에 죽는겨,,,

 

앞에 김홍도도 잠깐 언급했지만 정조가 육성한 인재들 즉, 과학이나 경제 문화에 뛰어난 사람들은

정조 죽고 아무것도 못하고 다 죽거나 유배가거나 파직해서 고향가거나 그런겨,,,

 

여하튼 정조가 이루어 놓은 성과들은 하나하나 부정되었고 정조가 구사했던 논리는 반대 세력들이

정조의 성과를 부정하는 논리로 변형되는겨,,,

그리고 정조가 치죄했던 인물들은 하나 둘씩 복원되고 노론의 반대파들은 사형 또는 귀향 가는겨,,,

정조가 총애했던 정약용도 이때부터 무려 18년간이나 유배생활을 해야만 하는겨,,,

 

내가 정조가 좀 더 오래 살았다면,

지금 한국이라는 나라가 세계경제에서 1~2위를 달릴거라는게 과장하는거 아녀 ??,,ㅋㅋ

 

그동안 정조가 수많은 개혁을 추진하면서 참신한 인재 등용과 더불어 인재들의 해외 연수와 

외국 문물 흡수와 그에 맞는 제도 정비등등등,,,

그동안 개혁하기 위한 틀을 마련했다면 ,,,

이젠 그렇게 키워놓은 인물들을 대거 국가의 브레인 자리에 올려서

본궤도를 향해서 쏘아야 하는 시점에 딱 그 시점에 죽냐는겨 ??,,,

이런애들이 이제 재상에 등용되어서 본격적인 개혁의 박차가 시작이 되어야 하는건데,,,,

왜 딱 거기서 죽냐는겨 ??,,

 

봄오는 소리에 반갑게 내민 봉오리

난데없는 暴雪 뿌리까지 얼어죽으니

조선은 다시는 피지 못하는겨,,,,,

 

한마디로 하늘이 좃선을 버린겨,,,,(조선일보는 빵빵하게 잘 나가는데)

위에 좃선은 오타난건데 ,, 왠지 어울려서 냅두는겨 ㅋㅋㅋ

 

아무튼 개인적으로 조선역사에서 정조의 죽음이 가장 아쉬운 순간인겨,,,

몇십년 동안 개혁의 틀을 짜고 이제 나아가기만 하면되는데 ,,,,,,

결국 우린 이 후에 나라 뺏겨서 식민지 살다가 지금 요꼬라지로 사는겨,,,

 

지금 꼬라지가 꼭 나쁘다는게 아니고 어차피 실학자들이 말한 그길로 가는것을

너무 많은 시간 너무 많은 희생을 치르고 가고 있으니 좀더 일찍 걸었더라면 하는 안타까움과 아쉬움인거지,,,

물론 지금도 제대로 가고 있다고 볼 수 없는 무언가가 많이 있지,,,

"무언가 "는 알아서들 해석혀 ㅋㅋ

 

실학자들중에 박제가만 훌륭하다고 말하는거 절대 아닌겨,,,

단지 박제가를 대표로 글을썼을 뿐인겨,,,

또 이글 절대 애들 보여주지말어,,,

조선시대 박제가의 업적에 대해서 서술하시오 그러면

반드시 로보트 태권브이 제작 이러고 답쓴다 ㅋㅋㅋ

그럼 애가 학교에서 왕따당하는겨 ㅋㅋㅋㅋ

 

정조의 개혁이 본궤도만 진입했어도,,

일본 여자들은 지금쯤 서로 조선에 시집올려고 밀입국 할텐데,,,

어이없게도 일본 여자들은 중국 남자보다 한국 남자가 더 싫다는겨,,,

과거 식민지 나라의 남자들이니까, 아오,,,

 

정조만 살았어도 으로 밖에 못쓸것들이 ㅋㅋㅋ

 

정조의 개혁이 성공했다면 지금 쯤은 조선에 아래 그림과 같은 이쁜 여자들이 득실 거릴텐데....

 

수원화성의 정조대왕 축제기간중,,,,

 

글을 쓰면서 느끼는 거지만 더 많은 것들로 더 많은 내용 더 많은 재미로 쓰고 싶은데,,,

희한허게 보수가 정권 잡으면 동네 서점에서 파는 책들보다도 규제가 더 심해서,,,

이런 내용으로 쓰면 짤릴까 고민하게 되고 또는 못쓰는 글들이 많아서

당분간은 좀 쉬야할 것 같은겨,,,

규제에 맞쳐서 써야하는 창작의 고통이랄까 ???ㅋㅋㅋ

 


 

또 다른 이야기

정조의 한방 처방에 나오는 어의 강명길의 인생유전

가미소요산은 정조가 죽어가는 순간까지 애용한 처방이다.

이는 <장자(莊子)>'소요유편(逍遙遊篇)' 내용과 관련이 있다.

큰 물고기가 대붕(大鵬)이 되어 우주에서 날개 치는 이야기인데, 소요산을 복용하면 마음이 상쾌해져 넓은 천지에 대붕이 자유롭게 날개 치는 듯한 기분이 든다고 한다. 가미소요산은 본래 부인에게 사용하는 경우가 많으며 생리 전에 화를 내거나 어깨 결림, 두통, 불면, 변비 증상이 있을 때 효험이 있다. 주로 갱년기 여성의 열이 오르는 증상에 쓰는 약을 강명길이 추천해 복용함으로써 정조는 신기한 효과를 봤다.

정조의 해묵은 화병에 갱년기 증세가 포함된 것을 파악한 강명길은 가미소요산으로 정조의 절대적 신임을 받는다. <동의보감>에도 없는 약을 처방해 신기한 효험을 보자 정조는 강명길과 공동 저작을 기획한다. 정조 23년 완성한 <제중신편(濟衆新編)>이 그 결과물이다. <동의보감>의 최종 업그레이드판인 이 책은 흔히 강명길의 저작인 줄 알지만 정조가 만든 <수민묘전(壽民妙詮)>이란 책의 증보판이다. 실록은 이렇게 전한다.

"(정조가) 세자로 있을 때 영조의 수발을 위해 10년 동안 끊임없이 연구한 것은 진맥에 대한 비결과 탕약에 대한 이론이다. () 몇 차례에 걸친 수정을 거듭한 끝에 <제중신편>을 완성했다."

정조는 편애에 가까울 만큼 강명길을 감쌌다. 당시 경기북부 어사였던 정약용과 채홍원이 발의해 부평부사를 지낸 강명길의 죄상을 밝힌 일이 있다. 정조는 가장 사랑하던 정약용이 "재결(災結·자연재해를 입은 전답)은 훔쳐 먹고 군보(軍保·군역에 복무하지 않는 대신 정군의 복무 비용을 부담하는 장정)에게는 침징해 허다한 불법을 저질렀으니 용서하기 어렵습니다"라고 그를 탄핵했음에도 강명길을 귀양 보내는 척하다 한 달 후 어의로 복직시켰다.

정조의 최후는 강명길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의학에 관한 한 탁월한 이론가였던 정조는 누구보다 자신의 체질을 잘 알았다. 초기의 종기가 번지게 된 원인이 인삼이 든 육화탕에 있음을 알고 인삼을 기피했다. 마지막 순간엔 자신의 평생 건강 처방인 가미소요산을 합한 사물탕과 경옥고 사이에서 갈등한다. 정조는 강명길의 추천이라는 말에 인삼이 든 경옥고를 복용한다.

정조 사후 강명길은 노륙 형에 처해졌다. 본인은 극형에 처하고 아들은 외딴섬으로 보내는 것인데 그는 고문 후유증으로 바로 죽게 된다. 효종의 종기를 치료하다 죽음에 이르게 한 현행범 신가기가 극형에 처해진 이후 최악의 형벌이었다. 정조의 신임 아래 최고의 권세를 누린 강명길은 마지막 순간 최악의 구렁으로 떨어졌다.